국산품 애용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우리 상품의 소비를 늘리자는 물산장려운동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국산품애용은 그렇게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하여 우리상품을 애용하여야만 외화의 유출을 막을 수 있었기에 정책적으로 장려하였다.
학교에는 복도마다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포스터를 눈에 띄는 곳마다 걸어두었다. 불조심 강조기간 포스터만큼이나 일상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세대는 6.25 전후라 물자가 풍족하지 못하였고, 상품의 질도 외제에 뒤져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더구나 외국에서 원조해준 물자 대부분이 외제이었기에 외제는 무조건 좋다는 인식이 있던 시절이다.
미국 군인들이 피우다가 남는 양담배는 불법적으로 유통시켜 남대문시장이나 도깨비시장에서 음성적으로 팔았다. 서민들과 다르다는 표시처럼 다방에서 양담배를 피우면서 자신의 지위를 뽐내며 담배연기를 뿜어댔다. 이렇게 숨어서 피우다가 단속반에게 걸리면 벌금에 처해지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시절 학교 앞에서는 연필장사가 얇은 합판에 연필을 던져 구멍을 마들었다. 그것이 좋은 연필인줄 알고 사가지고 집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연필이 골아서 똑똑 부러져 나갈 때면 비싸게 산 연필이었기에 어린 마음에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옷도 지금처럼 다양한 상품을 골라사는 것이 아니라 양복점이나 양장점에서 맞춰 입던 시절이다. 기성복은 건빵바지라고 불리는 서양군복에 검은 물을 들여서 시중에 내다파는 물건인데 옷감이 질겨서 오래 입을 수 있어서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검게 물감을 들이지 않으면 그 당시에는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벌금을 물어야 하기에 파는 사람이 공통적으로 검은 물감을 들여서 팔은 것이다.
지금은 맞춤복점을 보기조차 힘들어졌지만 예전에는 양복점, 양장점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오히려 지금은 기성복이 대중화되면서 특별히 맞춤복을 입는 사람을 찾기 힘든 시절이다. 그만큼 상품의 질도 좋아지고 신뢰가 쌓여서 메이커를 보고서 명품을 구분하는 좋은 시절이다.
예전에는 동네에 조금 큰 공터가 있으면 천막을 치고 야시장이 들어섰다. 먹거리부터 일상용품을 파는데, 알전구가 반짝이는 밤에만 장이 서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국산품애용’이라는 작은 표 딱지를 주고서 부르는 번호에 가로 세로 사선으로 맞으면 상품을 주는 빙고게임이 있었다. 아저씨는 마이크에 커다란 소리로 ‘국에 1번, 산에 2번’ 열심히 부르면 일자로 된 나무의자에 어른들이 앉아서 열심히 번호에 색을 칠했다. 지금의 로또복권 맞추듯이 빙고에 당첨되면 표딱지를 흔들면서 좋아하며 상품으로 양은 냄비를 받던 기억이 떠오른다. 도박에도 국산품애용이 이용될 정도로 그만큼 국산품 사용이 절박했다. 서민들도 국가경쟁력 향상에 호응하여 지금의 잘사는 나라로 인정받는 밑거름이 되었다.
노원신문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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